지난 기획/특집

신임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 삶과 신앙

이지연 기자
입력일 2010-07-21 수정일 2010-07-21 발행일 2010-07-25 제 2707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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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성인 가르침 몸소 실천한 삶
4남매 막내 … 어릴적부터 주변 잘 돕는 착한 성품
서울대 졸업 후 대기업에 근무하다 선교사 길 선택
2년 간 짧은 본당 사목 후 관구장 신학원장 등 역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마음만큼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남을 돕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던 어릴 적 성품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바쁜 일이 있어도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 한번 하지 않고 바로 달려갔다. 때로는 화를 낼 법도 한데 그보다는 넓은 아량으로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형님의 모습으로 신자들을 감싸 안았다. 군종교구장 임명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똑같은 형제 자매로 대하고 싶다”라는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해 온 삶이었다.

천주교와 짧은 인연 긴 여운

유수일 주교는 1945년 3월 23일 논산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불교와 미신 등 토속신앙을 믿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합격할 만큼 학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유 주교는 이후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장학금과 가정교사를 하면서 번 돈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천주교를 처음 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누구의 인도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그는 홀로 대전 대흥동성당을 찾아갔다. 반기는 사람도 없었고, 챙겨주는 사람들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성당을 다녔던 3개월의 기억은 유 주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깊은 여운을 남겼다.

대전고등학교 시절 유수일 주교(왼쪽).
서울 대신학교 학부 졸업식날.

주님의 품안에서 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입학한 유 주교는 같은 반 친구를 통해 개신교의 한 선교회를 알게 됐다. 이곳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등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됐다. 가난으로 괴로움을 겪었던 유 주교에게 예수와 영접할 기회를 준 신앙은 큰 기쁨이자 힘이었다.

1969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1년 후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안정된 삶을 포기했다. 선교사 교육을 받으면서 유 주교는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접했다. 그의 삶에 감명을 받아 성인전도 단숨에 읽어 버릴 정도였다. 신앙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천주교 미사의 거룩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여운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피어 올라왔다.

마침 잠시 근무하던 대전 대성고등학교 근처엔 작은 형제회 수도원이 있었다. 하느님의 섭리였다. 입회를 위해서는 3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강원도 강릉에 있는 학교로 이동하면서까지 그 시간을 기다렸다. 그동안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약 1년 3개월 만인 1973년 유 주교는 결국 수도회에 입회했다. 먼 길을 돌아 왔지만 언제나 주님의 품에 있던 그였다.

유수일 주교는 1980년 2월 25일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명동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뒷줄 맨 오른쪽이 유 주교.
1980년 사제 서품식날 가족과 함께.

평생 성직자의 길을 걷다

신앙생활이 길지 않았던 탓에 사제성소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저 사부이신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입회 후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유 주교는 생각지도 못한 기로에 서게 됐다. 성직자와 평수도자로서의 삶을 선택해야했던 것. 3일 간 깊이 묵상했다. ‘미사’의 거룩함을 잊지 못해 수도회에 입회한 유 주교는 미사의 중요성과 영신지도에 고해성사도 연결돼 있음을 알고 성직을 택했다. 1974년 서울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학년으로 편입했고, 종신서원(1979년)을 한 이듬해 사제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유 주교는 수원교구 세류동본당과 마산교구 칠암동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2년 3개월이라는 짧은 본당사제 생활이었지만, 사제로서 기쁜 삶을 살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경험이 부족했지만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은 누구 못지않았다. 특히 두 번의 세례성사는 그리스도를 모르던 신자들이 교리와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을 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깊어짐을 느꼈다고 했다.

이후 작은형제회 한국 준관구장, 수도자 신학원장, 한국관구장, 본부 총평의원, 정동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수호자, 서울 청원소 부수호자 등을 역임해 오면서도 신자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한번 알고 지낸 이들은 가족처럼 보살피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재속프란치스코회 서울 야고바 형제회 이국희(모니카·64·서울 반포본당) 회장은 “주교님은 아버지같이 하나하나 챙겨주시는 분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며 “늘 겸손하시고 가식이 없으셔서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고 사제로서의 유 주교를 묘사했다.

유 주교가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수도자 대표로 기념 선물을 전달했다.
관구장 재직 당시 선교사 파견 안수를 하고 있는 유 주교.
작은형제회 한국 관구장 재직 당시 캐나다를 방문한 유 주교(가운데).

【축사】작은형제회 관구장 기경호 신부

“이제 군 복음화 열매 이루시길”

사랑하는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를 주교 직무에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작은형제회 한국관구의 모든 형제들의 형제적 사랑과 존경을 담아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세속적 의미에서 지위를 얻는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제자로서 ‘만인의 형제’가 되어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선(善)을 실어 나르는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내어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새로운 주교님을 맞는 군종교구의 모든 사목자들과 교우 여러분께도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주교님!

아마도 군종교구의 신자들은 수도자 출신 주교에게 거는 또 다른 기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늘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다운 겸손과 따뜻한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선물이 되어주셨던 것처럼 군종교구의 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해주는 목자가 되어주시길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의 작은형제로서 몸에 배인 수도정신과 영성을 바탕으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주시리라 믿습니다. 군종교구의 신자들의 외적 성장도 중요하겠지만 내적 삶에 더 맛을 들이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 보시기에 좋은 군 복음화의 열매를 이루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과 성 프란치스코의 축복 안에서 기쁘게 주교직을 수행하실 수 있도록 저희 모두 형제적 사랑으로 기도하며 함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지연 기자